이재훈 목사님 -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하박국 1장 1-11절)
하박국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과 그 질문에 대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박국서는 선지서이지만, 그 예언의 내용이 하박국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대화의 내용으로 구성된 독특한 선지서이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들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예언하고 책망하는 역할을 하지만, 하박국은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하여 따져 묻는, 때로는 항의하고 질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 하박국에 대하여 구약의 소크라테스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 질문하는 선지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매우 자상하게 응답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문을 정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으며,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가 배움의 지식이 증가할 때 질문을 한다. 왜?라는 질문. 아무 질문이 없는 자녀라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녀가 학습이 발달하면 반드시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라도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신앙의 학습도 마찬가지이다.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그것은 불신의 의문이 아닌, 알고자 하는 의문이며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고자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말이 있다. 알고자 하는 것은 믿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신자들을 만나게 되면 불필요한 것 같은 질문을 듣게 된다. 그러나 그 질문을 비판하거나 외면하면 안된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질문 같지만, 그 분에게는 그 질문이 꼭 필요한 것이며,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박국과 비슷한 질문을 던진 인물은 욥이다. 욥은 자신의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다. 자신의 징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징벌이라면 하나님께 의롭게 살고자 했던 내가 왜 이 징벌을 받아야 했는지 질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박국은 공동체에 대한 문제, 역사와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또한 하나님께서 마땅히 징벌하셔야 하는 불의와 폭력을 왜 내버려두고 개입하지 않으시고 왜 정의로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질문을 던졌다.
하박국 선지자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하박국 선지서 외에는 그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정확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 추청하기 힘들다(대략적으로 주전587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이전의 사람으로 추정/여호야김 시대일 것으로).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포옹하다, 끌어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틴루터는 하박국을 ‘포옹자’라고 말했다. 우는아이들을 포옹하여 달래듯이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기만 하면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백성을 끌어안고 포옹하고 위로하고 붙잡아 주었던 선지자라고 해설을 한 것이다.
심판이 목전에 있는데도 전혀 위태함을 모르는 그 시대, 그 백성들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땅에 만연한 죄악과악을 하나님께서 왜 빨리 처리해 주시지 않는지 하나님께 나아갔던 선지자가 하박국 선지자이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는 두 개의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질문 : “하나님께서 왜 악인들이 정의를 왜곡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왜 개입하지 않으십니까?)
대답 : “나는 악인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바벨론으로 하여금 그 악인들을 심판하게 할 것이다.”
(악은 결국 처벌받고 의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에 의해 주전58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사건을 미리 말씀해주신 것이다.
그런데, 하박국은 이 대답에 대하여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통해심판하신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바벨론은 더 악한 나라였고, 더 악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박국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두 번째 질문 : “하나님께서는 왜 더 악하고 잔인한 바벨론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도록 하십니까?”
대답 : “바벨론도 그들의 악에 대해 동일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악을 심판하시고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악인들까지도 공의롭게 다스리셔서 더 크신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가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다.
하박국이 이러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박국서의 중요한 주제가 나온다.
2장 4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유다 백성을 쓸어버릴 것이지만,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의인은 악함에 이끌려 무나지지 않고 인내하고 믿음으로 살 것이다. 모든 상황 속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따르는 자들은 살 것이다.
실제적으로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났는가?
예레미야을 통해 심판의 한복판에서 살 길을 알려주신다. 포로로 스스로 잡혀가라. 저항하지 말아라. 도망가지도 말아라. 오직 살 길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여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너희를 살릴 것이다. 그곳에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70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올 자들을 남길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길은 죽는 것 같지만 거기에 살 길이 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길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길은 구원하시는 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방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믿음으로 살 길이 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히브리서의 믿음의 모든 영웅들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사도바울이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로마서 전체 줄거리를 이어간다.
또한 이것은 종교개혁의 모토가 되기도 한다. 마틴 루터 의해 로마서의 말씀이 발견된다. 따라서 하박국은 영적 조부와도같은 인물인 것이다.
하박국은 어떠한 시대이건, 하나님이 시대를 어떻게 움직이시든,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영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3장에 이르러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그가 가졌던 의문과 항의가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게 되었다(from protest to praise). 그의 마음에 있던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뀌고(from fear to faith) 그가 가졌던 염려가 경배로 바뀌었다(from worry to worship).
우리의 내면도 이렇게 변해야 한다.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은 하박국서에 나타난 이 변화를 장마다 세 단어로 표현한다.
1장 : 염려자(Worrier)
2장 : 관찰자(Watcher)
3장 : 예배자(Worshiper)
1장은 하나님께 대한 실망 섞인 항의로 시작된다(2-4절).
하박국의 실망은 불신자의 실망이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행자의 실망이다.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질문할수 있는 것이다. 의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질문이었으며, 용기있는 질문이었다.
또한 하박국에 실망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실망감이다. 자신이 속한 나라와 민족, 역사에 대해 깊은 책임을느끼는 실망이었다.
이스라엘은 택함받고 율법을 받은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저버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박국은 안타까웠던것이다. 당시 율법을 저버린 것은 지금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저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하박국과 같은 질문, 하나님께 대한 안타까움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박국은
하박국의 실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실망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못 견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심으로도 일하신다. 하나님은 아들의 십자가에서의 부름에도 침묵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기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신다. 침묵하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나치가 지배하던 시대에 독일 쾰른 지하 감옥의 벽면에서이런 문구가 발견되었다. “나는 태양이 없을 때라도 태양이 있다고 믿는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사랑이 있다고 믿는다.”
하박국이 실망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그리고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악에 대한 심판을 포함한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며 악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포함하신다(11절).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와 정반대로 전개될 수 있다(6절).
하나님께서 유다를 벌하기 위해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신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큰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더 넓은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는 온 세상을 바라보시며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5절).
십자수를 뜰 때 어떤 그림으로 뜨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도 판을 반대로 뒤집으면 아름다운 그림이 있듯 하나님의 섭리도그러하다.
세상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서 연결된 사건이다.
베들레헴의 나오미라는 여인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잘 살아보겠다고 갔지만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룻과 함께 돌아왔을 때, 그 룻을 통해 이스라엘의 참된 왕인 다윗이 출생하게 된다. 한 개인의 불행처럼 보이는 사건이 이스라엘민족과 연결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듯이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섭리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의인으로 사는 삶이다. 역사는 his story, 그분의 역사다.
우리가 사는 삶도 공의가 무너지고 깨어지는 시대이다. 이 시대를 놓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도 신실하게 일하신다.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