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님 - 타협하면 안 되나요(사도행전 7장 51-60절)
Q. 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되었나요?
Q. 스데반이 순교하면서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Q.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신앙의 길을 걸어야 할까요?
목사님이 이 본문을 가지고 외국의 어떤 교회의 목사님 말씀을 듣던 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오클랜드라는 곳에 스카이 타워가 있는데, 그 옆에 스카이시티 호텔이 있는데 거기에 비상시 주의 사항이 써있었는데,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Do not use life in fire. - 이건 어디에나 있는 문구였구요.
Walk! Don't run. - 뛰지 말고 걸으십시오 (화재 중에 뛰면 위험하다는 것이죠)
여기까지는 흔히 보던 내용이었는데, 다른 한 가지
Do not go back - 되돌아가지 마세요 라는 문구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화재가 났을 때, 사람들이 방에 있는 귀중품이 생각나서 돌아갔다가 위험을 당하는 일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가장 중요한 일로 죽는 것, 후회하지 않는 일로 죽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내가 왜 이렇게 죽을까, 내가 괜히 이것을 해서 죽음에 이르렀구나 후회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스데반은 왜 죽었는지, 스데반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스데반이 만약 죽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마음에 찔려 (niv에서 furious - 분노)
또다른 하나는 찔림을 감추기 위하여 과도하게 하는 반응
- 이것이 이들을 폭도로 변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통해서 찔림을 주시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죠.
한 가지는 말씀을 듣고 찔려서 회개하는 것, 또 하나는 그것을 감추려고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이 말씀을 전했던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스데반이 했을까. 51절부터 5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7장 51-53절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우리는 종종 '소신껏,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멋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념이 성령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거에요.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그들이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은 종종 마음의 생각과 죄 지은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드러나지 않게 덮어주셨어.
여기서 끝나는 것이라면 축복일 수 있지만, 나중에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나는 것이라면 결코 숨겨지는 것이 축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과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는데
스데반이 죽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분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꼭 스데반이 그렇게까지 말씀을 전해야만 했을까...
꼭? 꼭!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융통성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스데반도 꼭 유대인에게 저렇게 말씀을 전해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A.W 토저 목사님은 '세상과 충돌하라' 라는 책을 썼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과 충돌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잘못된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세상과 충돌한다면 그것은 오케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념과 관습으로 세상과 충돌하면서 그건 우리들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데반도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차이라면, 55절의 말씀과 같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게 되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 가운데 있었고, 스데반을 죽인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는가.
내 소신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여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다스리고 계셔! 이것과 내 소신으로 내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NIV를 보면 하늘을 우러러를 'look up'이라고 했고, 그가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는 것을 'see'의 과거형 saw를 사용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look up은 의지적으로 고개를 들어서 보는 것이고, see는 그냥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의지적으로 고개를 들어서 스데반이 하늘을 보았을 때 본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의지적으로 본 것, 그리고 보인 것 이것을 보면서 자신이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정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두 가지를 다르게 듣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타협하지 마시고 충돌하세요! 라고 듣기도 하고, 이 세상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라는 메시지입니다.
어느 때 충돌해야 하고, 어느 때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스캇 솔즈 목사님의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고 어둠 속에 빛을 비추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아무리 사랑이 기반이 되어도 반대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분노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 화를 냈던 사람들과 같은 부류여야 한다.
예수님께 분노한 사람들과 같은 부류여야 우리가 싸우고 억울한 말을 들을 때,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와 도둑, 주정뱅이, 성적으로 죄를 지은자, 식탐이 많은 자, 죄인,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께 대해 분노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끌렸다. 그분을 통해 공동체에 끌렸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을 가장 반대한 사람들은 독실한 교인들이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반대를 경험하고 세상이 우리를 핍박할 때,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들에게 핍박 받는 것은 오케이.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따랐던 자들에게 핍박을 받는다면 우리는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핍박 당하고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세상이 교회를 욕할 때, 그리스도를 욕하지 않고 교인들을 욕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쟁이들을 욕하고 있다는 것.
복음이 필요하고, 따라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스데반을 지금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면, 당연히 핍박을 받아야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지 않으면서 세상과 충돌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우리 기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처럼'이 아니라 다른 우리의 고집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처럼 말하고 행동했더니,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다!
그가 의도적으로 하늘을 보았을 때, 그가 받았던 핍박.
우리의 행동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보며 먹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저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먹으면 안되는 것인지를 이유를 알면 우리는 본능대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픈 것이 의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안다면 고통을 참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기꺼이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던 것. 우리 인생의 가치.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가 수치스럽게 혹은 너무 아파하며 죽은 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복된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왜 순교했을까요? 성령 충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성령 충만 했는가.
Q. 만일 스데반이 순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황 속에서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는 요한복음에서 설명하고 있고, 성령의 역사를 담은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아서 스데반이 순교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성령께서 왜 스데반을 순교의 자리로 이끄셨는가'를 잘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예수님께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약속
사도행전 2장 약속하신 성령을 받음
사도행전 3장 성령받은 제자들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
사도행전 4장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말씀을 전할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각 자의 필요에 따라 나눠준 것
사도행전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서 성령을 속여서 죽임을 당함
이 모든 일들이 예루살렘 초대교회 엄청난 부흥을 하게 됨.
사도행전 6장 그래서 일곱 집사를 뽑는데 그 중에 하나가 스데반
사도행전 7장은 그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한 것
여기서 상상을 해봐야 합니다.
스데반이 돌을 맞았는데도, 안죽고 사는게 정상인가 죽는게 정상인가
사람들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니까 돌에 맞아도 죽지 않는 것이 정상.
성령께서 붙들어 주셔서.
지금 우리는 죽은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만, 초대교회에서는 당연히 성령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스데반이 죽은 것입니다. 이건 사람들에게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니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어떻게 사람이 돌에 맞아죽어. 안죽는게 정상이지.
그런데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에 기초해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계획이 스데반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그 계획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왜 죽을 수 밖에 없었을까. 죽음의 결과가 사도행전 8장 1절입니다.
이 죽음의 결과 사도행전 8장 1절을 뒤집어서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8절)
이 말씀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죽이신 것입니다.
세상은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서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명자는 죽어갈 때, 하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나라에 계심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스데반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취소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죽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가 조금 더디어졌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8절.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 사울은 나중에 바울이 된 사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이렇게 말씀이 나오고,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회심을 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심을 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사울이 등장하고, 9장에 회심을 하면 8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빌립이라는 사람이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세례를 줍니다.
사도행전 8장까지는 사도들이 주인공이었다면, 9장부터는 사도바울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진행됩니다.
어떻게 이런 회심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에서 피가 튀는 모습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서,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마음이 심난해져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서 고꾸라진 것이 아닐까요.
스데반의 순교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아픔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성령 충만한데 내 계획과 내 상식과 맞지 않다면,,,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에 맞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인도해가고 계신다!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