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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현 목사님

이규현 목사님 - 크고 작은자의 기준(열왕기하 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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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열왕기하 5장 1절에 보면,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람이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 서열 1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가 큰 사람인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부러워할 만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He was a valiant soldier, but he had leprosy.”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but 이후의 문장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모든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삶을 흔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좋겠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나아만에게 있는 한 가지 결함은 나아만이 가진 것을 모두 뒤엎어놓았습니다.

조건과 환경 모두 좋습니다. 최고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결함으로 인해 그는 불행했습니다. 한 가지 결함이 그의 모든 것을 뒤집어놓았습니다.

삶을 돌이켜보며 ‘이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일만 없었다면, 이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어느 가정에나 있습니다.

다복해 보이고, 문제없어 보이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어려움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다 갖춘 것 같은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에게 있는 하나의 문제는 그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렸습니다. 본문 열왕기하 5장 1절에 보면,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나병환자인 것이 그에게 결정적인 결함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나병환자라는 사실은 그의 인생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의 모습입니다.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화려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의 문제를 안고 전전긍긍합니다. 신음하며 살아갑니다.

나아만이 가진 결함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병은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현대의학에서도 나병은 불치병으로 분류합니다. 정상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나병은 삶의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했습니다.

이처럼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위기는 사람이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열왕기하 5장 2절에 보면,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온 소녀가 등장합니다. 나아만 아내를 수종 드는 소녀였습니다.

소녀는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소녀의 이름도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눈여겨볼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녀를 지나칠 수 있습니다.

소녀는 크고 존귀한 자 나아만과 대조됩니다. 소녀는 매우 작은 존재, 미미한 존재,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본문 열왕기하 5장 3절에 보면,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녀가 여주인에게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소녀는 나아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낫게 하실 것을 소녀는 믿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아만이 소녀의 말을 듣고 처음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나아만은 소녀의 말이 믿을 만한 것인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수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자존심이 매우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소녀의 말을 듣고 움직였습니다. 나아만은 소녀의 말대로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직접 나아만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 5:10)”고 말했습니다.

이때 나아만은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종들이 와서 그를 설득하여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나아만은 죽을 위기에 놓였음에도 자존심이 발동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에까지 갔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낫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자를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 5:10)”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화가 나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아만이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온 소녀가 말한 대로 하는 것은 나아만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소녀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큰 자와 작은 자가 바뀌어버렸습니다.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온 소녀가 아람의 최고 권력자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소녀가 가지고 있는 복음으로 인해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만히 보면 나아만은 큰 자도 아니요, 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에 불과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나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습니다. 나아만이 자존심을 붙들고 있으면 소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살 수 있습니다.

나아만의 모습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포장한 채 살아갑니다. 명함이 화려합니다. 자신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은 내면의 불안을 의미합니다.

소녀는 자신의 여주인에게 단순히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닙니다. 얄팍한 지식이나 풍문을 전달한 것도 아닙니다.

소녀가 여주인에게 말했다고 해서 나아만이 소녀가 말한 대로 했겠습니까. 소녀는 확신을 가지고 여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소녀는 작은 자 같지만 큰 자였습니다.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왔습니다. 나아만은 수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소녀가 말한 대로 움직였습니다. 포로가 군대 장관을 움직였습니다. 누가 누구를 움직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움직입니다. 여기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 누가 누구를 움직입니까.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외적 조건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열쇠를 누가 쥐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특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어도, 우리 안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위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우리를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본문 열왕기하 5장 3절에 보면,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온 소녀는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소녀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확신에 찬 소녀의 한 마디가 나아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이사야 60장 22절에 보면,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자입니다. 그러나 천 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보고 유혹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진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우리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영원의 운명을 결정짓는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능력은 헬라어로 ‘δυναμις(두나미스)’입니다. 복음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살려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복음은 완전합니다. 복음은 세상의 유일한 진리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려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온 소녀는 겨자씨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겨자씨는 미미합니다. 매우 작아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작고 미련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8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은 처음에는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다윗은 소년이었습니다. 어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요, 큰 자가 작은 자입니다. 세상의 모습과 매우 다릅니다.

한 아이의 도시락이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이 먹고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적은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볼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루살렘을 흔들었습니다. 온 유대를 흔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매주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들이 장차 무슨 일을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을 통해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결코 작은 자가 아닙니다.

다음세대이지만 지금도 엄청납니다. 중ㆍ고등학생이 철야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왔습니다. 그녀는 복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소녀는 군대 장관 나아만에게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나아만을 움직였습니다. 어디에서 비롯된 영향력입니까. 돈도 권력도 지식도 아닙니다. 진리에서 비롯된 영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복음으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본문 열왕기하 5장 3절에 보면,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녀는 나아만을 위해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여주인에게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전했을 뿐입니다.

간단합니다. 자신이 아는 대로 전하면 됩니다.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산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전하면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 믿는 것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소녀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왔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마음이 열려있었습니다.

주인에게 무관심할 수도 있었습니다. 포로로 붙잡혀 왔으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주인의 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아람은 이스라엘과 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녀는 나아만으로 인해 주인의 가정이 겪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소녀는 포로로 붙잡혀왔지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살아남는 것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가정이 겪는 문제에 참여했습니다. 주인의 가정에 애정을 가졌습니다. 마음이 열려있었습니다. 자신의 상처에 빠져있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주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을 주인에게 전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인정 받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간수장은 옥중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에 빠져서 삽니다. 자신에게 매몰되어 삽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합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인류 전체가 거리두기를 합니다.

전염병 시대의 특징은 혐오입니다. 혐오 그룹을 만들어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가능한 사람을 만나지 않고 거리를 둡니다. 심한 경우에는 적대적인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편리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화의 부정적인 영향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공감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철저히 개인주의화 되어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은 위험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남의 입장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은 남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담을 쌓고 삽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타인에게는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외톨이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잔인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가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개인의 삶에 집중하여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개인의 삶, 개인의 고통, 개인의 상처에만 집중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동굴을 만들고 동굴 속에 들어가 그 속에 무덤을 팝니다. 그런데 동굴에서, 자신의 문제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야 하지만, 관계의 거리두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관심을 더 가져야 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다가가야 합니다.

소녀는 포로로 붙잡혀왔습니다. 비천한 신분입니다. 자신이 겪는 삶의 문제만으로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녀는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인 이방 나라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소녀는 자신이 가진 복음의 메시지를 자신의 주인에게 알려주어 나아만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녀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녀를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집에 심으셔서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 들게 하셨습니다.

소녀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집에서 여종으로만 산 것이 아닙니다. 소녀는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노예로서의 정체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자랑스럽게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소녀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약 소녀가 가만히 있었다면, 나아만은 나병으로 인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소녀가 가만히 있었다면, 소녀는 노예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붙잡혀 온 포로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나아만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나은 것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소녀를 주목합니다.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붙잡혀 온 포로였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느헤미야서, 에스더서와 다니엘서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존재였지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어디에서든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든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방향과 목적을 찾게 하고,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바른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직급과 상관없이 영적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붙잡혀 와서 나아만의 집에서 아무 일 없이 잘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왔습니다.

소녀를 그곳에 심으시고 소녀를 그곳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소녀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평소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결정적인 순간, 결정적인 결함으로 인해 고통할 때, 그때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가진 복음의 비밀을 깨닫습니다.

소녀는 나아만에게 복된 소식을 전했고, 그것에 반응한 나아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소녀가 전한 이야기가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복된 소식을 혼자 끌어안고 있으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전령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복음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직급이 우리의 가치,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직급이 아무리 높아도, 복음이 없는 사람은 그저 그렇게 살다가 끝납니다. 그러나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의 위력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야 합니다. 전령이 전하는 메시지는 탁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탁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자부심, 복음에 대한 확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전령으로 살 때, 어느 순간 우리에게 기회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누군가를 살리십니다. 이것은 흥분되는 일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설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시키지 않고 그대로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전할 뿐입니다. 잘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탁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놀라운 비밀을 가진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은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담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소녀는 이제 더 이상 포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령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심으셨습니다.

언뜻 보면 불행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녀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아람의 크고 존귀한 사람 나아만,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겉은 멋집니다. 화려합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불안한 존재입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너져버립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붙잡혀 왔습니다.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내세울 것, 자랑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나아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복음이 사람을 살립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혼란한 시대입니다. 이 세상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복음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로마를 변화시켰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복음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은 귀중한 것입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것은 특권입니다.

본문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누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아만이 큰 자요 영향력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큰 자는 소녀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복음으로 인해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누리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영광스러운 복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랍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복음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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