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규현 목사님

이규현 목사님- 두 번째 눈뜸(마가복음 8장 22-26절)

728x90
반응형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본문은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도 맹인을 치유하신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예수님이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수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저 말씀만 해도 낫고, 직접 만나지 않아도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안수는 터치입니다. 주님이 맹인에게 안수한 것은 전적으로 맹인을 위해서였습니다. 맹인의 고통 바깥에서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아픔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맹인에게 안수한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 이상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안 보인다면 어둠 속에 사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습니다. 사업가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사기꾼의 눈에 보이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전공에 따라, 사람의 경험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바로 나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따라가고 보는 것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보는 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맹인은 본문 24절에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라고 대답합니다. 사물의 형체만 보여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아직 보이긴 하지만 희미한 단계입니다. 분별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렌즈의 초점이 안 맞는 것과 같습니다. 왜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희미하게 보이는 것입니까? 여기에 중요한 레슨이 숨어있습니다. 맹인은 이제 막 어둠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동안은 어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처음 눈을 떴지만 명확하지 않고 아주 가까운 것만 희미하게 보이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근시라고 말합니다. 영적 근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곤두박질칠 때를 보십시오. 멀리 보지 못할 때입니다. 잠깐의 즐거움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코앞에 있는 것만 쫓아가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죄를 지을 때를 보십시오. 다른 게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가 허기진 상태에서 팥죽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돈을 좋아하면 돈만 보입니다. 어느 한쪽에만 시선을 고정하면 사각지대가 생깁니다. 왜 돈 때문에 사고가 납니까? 돈 이외에 다른 것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쾌락에 사로잡히면 다가올 고통이 보이지 않습니다. 권력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근시안은 우리의 삶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최악의 근시안은 어떤 것입니까? 한 시간 후의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물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까운 것만 흐릿하게 보이는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은 주님이 두 번째로 안수하는 대목입니다. 본문 25절,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두 번째 안수를 통해 맹인은 완전해졌습니다. 두 번째 안수를 통해 진정한 눈 뜸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은 단번에 완전한 치유를 하실 수 있는 분인데 왜 두 번의 안수를 하셨을까요? 마치 의사가 1차 수술을 했는데 실수를 해서 2차 수술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첫 번째 안수가 약했던 것일까요? 맹인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번거로운 일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전후 문맥을 보면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18절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떡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아직 눈이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본문의 두 번째 눈뜸을 통하여 눈이 열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일차적인 눈뜸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안수하심으로 눈이 열립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눈이 열려서 무엇을 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안수로 “그가 주목하여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주목하여 보았다는 말은 앞부분에 희미하게 본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이 두 번의 안수를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눈이 완전히 열려 밝히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깨우쳐주시고자 하는 레슨이 여기에 있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이전보다 시력이 좋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눈을 떠서 이전에 못 보던 것을 보았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눈이 밝아져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모른다면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제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근심에 찬 두 제자가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24장 30-31절은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눈이 열린 사람만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눈이 완전히 열리면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홀연히 빛이 임하는 사건을 만납니다. 그의 인생이 터닝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때 그가 만난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거대한 주제입니다. 학문하는 사람에게 눈이 열린다는 것은 학문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눈이 열린다는 것은 구원 사건과도 같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을 이사야 35장 5절에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예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눈이 밝아질 것이고 귀가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눈과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말씀은 무슨 이야기 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보아야 할 것을 보는 사건이 구원 사건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는 지금 눈이 열리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알립니다. 맹인을 낫게 하시는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가 지금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밤 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옵니다. 그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지식에 눈이 열리는 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이해는 다른 영역입니다. 그런데 영안은 우리가 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눈은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합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에 아주 해박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긴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어둠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바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때 바울은 갑자기 앞을 못 보고 일시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됩니다.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모든 것에 자신만만한 삶을 살아온 그가 갑자기 식물인간처럼 꼼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8절에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누군가의 손에 끌려다녀야 했습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습니까? 사도행전 9장 12절을 보니까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의 눈을 다시 열어주십니다. 주님이 이제 새로운 눈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18절에는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율법의 안경을 끼고 있을 때는 복음에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까? 눈이 가려져 있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바울의 눈을 다시 뜨게 하셨고, 바울은 예수를 보았습니다. 이제 그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보이던 것이 안 보이고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가 눈이 열린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연구를 해도 예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난 다음에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철학에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무언가 그의 눈에 비늘이 있습니다. 눈이 감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지식을 터득해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수련해서 어느 순간 득도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면 그것이 눈이 열린 상태입니다. 눈뜸의 기준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본문 이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눈을 떠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더디 믿고 미련하다고 책망하셨을까요?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메시아임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빵 문제를 해결해 줄 경제적 메시아로, 때로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공개적으로 맹인을 치유하십니다. 당신을 단순히 병 고치는 치료자로만 오해할까 숨어서 조용히 치료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거듭된 실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기적을 보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해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주인공이 나타났는데도 오해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비밀 중의 비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지식으로만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로마서 16장 25-26 전반절에 보면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감춰져 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눈이 열려야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가장 큰 혼란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인류 역사에 예수님처럼 오해받으신 분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각색하고 왜곡시켜 버립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닙니다. 한국안에서도 기독교는 유교, 샤머니즘 등과 뒤섞여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승부처입니다. 쉽고도 어려운 주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다른 문제는 그냥 풀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눈이 열려야 합니다. 성경 백 독, 천 독 하는 것도 좋지만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 눈이 열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19편 18절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말씀의 눈이 열릴 때 그리스도를 점점 더 알아가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가끔 성경을 읽을 때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구절,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구절을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대할 때 우리의 초점이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 눈이 열리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도록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제대로만 안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망가져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면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문제에 답을 주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가면 우리의 많은 의문과 고민들이 하나둘씩 저절로 떨어져 나갑니다. 미련한 삶이 벗겨져 나가고 무지의 구름에서 벗어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생깁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영적 지각이 열리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웠던 삶이 정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앙이 깊어져 간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의 기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빗나간 삶을 산 사람에게 아무리 돌이키라고 말해도 안 통합니다. 빗나간 자녀에게 아무리 교훈하고 겁을 줘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두 번째 눈뜸은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눈뜸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닌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위대한 사건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에 눈을 뜨고 나면 이전과 같이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져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눈이 점점 밝아져 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에베소서 1장 18-19절에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눈이란 무슨 눈을 말합니까? 바로 영안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무엇이 축복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잘못된 것을 구하게 됩니다. 눈이 밝아져 가는 것이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신앙은 타 종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보다 하나님 편에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것이 너무나도 큽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눈이 열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지극히 크고 풍성한 은혜들이 무엇인지 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보면 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눈이 열리면 달라집니다. “하나님~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면 감탄사가 터집니다. 문제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앙은 조금씩 눈이 열려져 가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사물과 사건을 보지만 그 너머 메시지를 읽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리면 그다음 장면까지 보입니다.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영적 시력의 회복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눈을 뜨고 점점 더 알아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을 더 알기를 원하는 갈망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가장 큰 주제는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입니다. 혹시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눈에 안수해주시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눈뜸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눈을 뜰 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걸작품들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비관하거나 자학하지 않아도 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에 눈이 열리면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작품인지 알게 됩니다. 축복을 축복으로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이 불행입니까? 눈이 닫힌 것입니다. 영적 눈이 열려야 합니다. 열리는 만큼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눈이 열리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해놓으신 것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근시안을 고쳐주시길 바랍니다. 병 낫는 것보다 눈이 열리는 게 기적입니다. 문제가 풀리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몽골 사람들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시력이 정말 좋다고 합니다. 승자는 누구입니까? 멀리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눈이 열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돌아갈 본향을 미리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에 눈이 열린 사람은 이 땅의 것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멀리 본 사람이 이깁니다. 그동안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착시현상에 시달렸습니다. 이제 희미하게 보였던 그리스도가 선명하게 보이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갈수록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아마도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았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어느 정도 그리스도를 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평생,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이름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주님 나의 눈을 열어주소서! 이것보다 더 절실한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두 번째 안수하셔서 밝히 보게 된 맹인처럼 우리 가운데도 영적 개안의 역사가 일어나고 갈수록 눈이 더 밝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눈이 열릴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에 모든 어둠의 일이 벗겨지고 참된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