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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목사님

이재훈 목사님 - 그분 앞에서 잠잠하라(하박국 2장 5-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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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박국서를 통해 매우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박국서가 다른 예언서와 다른 점은, 다른 예언서는 예언자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예언을 계시 받아 기록된 내용이지만,

하박국서는 하나님을 향한 질문에 대한 응답을 통해 예언의 내용이 주어진 것이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질문한다.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며, 이해는 질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아무 질문이 없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오, 믿음이 없기에 기대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실망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 있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삶이 뜻하는 바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 실망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성도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가지고 나아가 질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이다.

하박국과 같은 질문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악함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는 어디 있는가?”

하박국은 질문하고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해 신실하게 답해주신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악함에 대해 열거하시며 그 악함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악행에 대해 소상하고 정확하게 알고 계셨음을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을 우리가 믿고 사느냐는 또 다른 부분이다.

하박국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인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가 그 시대에 살아갈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 믿음으로 체험되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바벨론이 어떠한 악을 행했고, 어떤 벌을 내리실 것인지 말씀하셨을 때 의문이 풀렸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머리로 아는 하나님의 지식과, 실제 우리의 삶에서 믿음으로 체험하는 하나님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악행을 열거하시는 것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악행을 심판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의 질서 속에 나타나는 것은 악을 행하는 악함 안에 멸망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악행 그 자체에 멸망의 씨앗이 있어 그 씨앗이 자라나 결국 열매를 스스로 거두게 되는 방식으로 악행을 벌하신다는 것이다.

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8.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8)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반법칙’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에 있어서 그들의 악행에 대해 다섯 가지 저주와 심판을 말씀하신다.

6, 9, 12, 15, 19절에 보면 “화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예언을 하신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포이”라는 감탄사이다.

이 말은 장례 때 죽음에 대한 슬픔의 탄식으로 나오는 단어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을 벌하실 때도 슬퍼하시고 탄식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도 구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저주의 내용은 바벨론의 끝없는 탐욕에 대한 심판이다(2:5-6)

5. 포도주는 사람을 속인다. 거만한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무덤처럼 목구멍을 넓게 열고 있는 그는 마치 죽음과 같아서 결코 만족함을 모른다.

그는 모든 나라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고 모든 백성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만

6. 이들 모두가 그를 속담거리로 삼고 그에 대해 풍자와 비유를 말하지 않겠느냐?

화 있을 것이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으로 부유하게 된 사람아! 이런 일이 얼마나 더 계속되겠는가?’

악한 고리대금업자가 자신이 빌려준 돈에 대해 부채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하여 불법적으로 재산을 갈취하는 모습처럼

바벨론이 이웃나라에 대해 그렇게 행했다. 폭력으로, 강포로, 불법으로 짓밟고 끝없는 탐욕을 만족시키려 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다.

두 번째 저주의 내용은 거짓된 안전에 대한 심판이다(2:9-10)

9. 화 있을 것이다. 부당하게 취한 것으로 자기 집을 축재하는 사람아! 높은 곳에 자기 둥지를 틀어 재난으로부터 모면하려고 하는구나.

10. 네가 여러 나라들을 멸망시키려고 계획하나 것이 네 집안에 수치를 불렀고 네 영혼에 죄가 됐다.

역사적으로 악한 독재자일수록 경호와 자신의 치안을 최고로 여겼다.

바벨론 또한 높은 절벽에 둥지를 틀고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는 독수리처럼 그렇게 자신의 둥지를 만들었다.

실제로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시절에 세 개의 궁전을 지었는데

그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인공산을 만들어 정원을 만들고 자신의 집을 그곳에 지어 안전을 추구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권력과 힘으로 안전을 추구해도 거짓된 안전은 안전할 수 없다.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으면 안전한 곳은 없다.

세 번째 저주의 내용은 헛된 영광에 대한 심판이다(2:12-14).

12. 화 있을 것이다. 피로 성을 짓고 죄악으로 도시를 세우는 사람아!

13. 보아라. 수고한 것이 불에 타 버리고 힘들게 한 일이 헛수고가 될 것인데 이것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아니냐?

14. 마치 물이 바다를 덮는 것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 찰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나서, 그리스의 역사가였던 헤로도토스가 바벨론을 방문했을 때,

바벨론의 규모와 화려함에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도 자신이 세운 제국의 수도로 삼고 싶어 했다.

그 성벽은 두 개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27km 정도의 화려하고 견고한 성이었고,

성벽 위로는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가 빨리 달릴 수 있는 성벽이었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규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성벽은 포로로 잡아온 이들의 핏값으로 세워진 성벽이었다. 헛된 영광을 추구한 것이다.

스스로 이름을 내고 영광을 얻으려는 모든 이들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신다.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만이 세상에 가득하게 하신다.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것은?

마땅히 바다라고 불리는 곳은 물로 가득차야 한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이 세상이 참된 세상이 되려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물 없이 바다가 바다일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세상이 세상일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가득 찰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뿐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영광의 사모함이다.

타락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진 것이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께 참된 예배와 순종으로 나아갈 때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

네 번째 저주의 내용은 비열한 방탐함에 대한 심판이다(2:15-17).

15. 화 있을 것이다. 자기 이웃에게 술을 통째로 마시게 해 술에 취해서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 보이도록 하는 사람아!

16. 네가 영광 대신에 수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너 또한 마시고 몸을 드러내어라!

여호와께서 오른손에 들고 계신 잔을 네게 돌리실 것이며 수치스러움이 네 영광을 가릴 것이다.

17. 레바논에게 행한 폭력이 너를 압도하고 동물들에게 행한 폐해가 너를 공포에 떨게 할 것이다.

네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고 땅과 도시와 그 안에 사는 모든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했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방탕했다. 그런데 자신만 방탕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방탕하게 하여 수치스럽게 하고 그 수치스러움을 보고 즐겼다.

비열한 방탕함이다.

그들은 술만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술에 취해 이웃과 자연의 세계까지 무자비한 폭력을 행했다.

그래서 ‘레바논에게 행한 폭력’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그들은 레바논의 아름다운 백향목을 다 베어 갔고,

그 안에 살던 동물들을 죽이고 숲을 황폐케 한 죄를 범했다.

하나님은 이 바벨론의 모든 죄를 다 기억하셨다.

마지막 다섯 번째 저주의 내용은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이다.

이 우상숭배가 ‘어리석은’ 우상숭배인 이유는, 앞의 네 가지 저주,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깨어날 수 없고 일어날 수 없는 나무와 돌에 대해 일어나라며 도움을 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하나님은 안타까워하며 탄식하며 심판하신다.

역사 이래로 우상숭배는 끊어진 적이 없다. 칼뱅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라고까지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제하면 그 자리에 다른 것을 놓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예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을 ‘인간 스스로 느끼는 비참함’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 가운데 인간만이 비참함을 경험한다. 단순한 불안과 염려 정도가 아닌 비참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위치에서 떨어치면 비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비참함을 채우려 다른 우상을 부어도 그것은 퍼진 웅덩이와 같다. 오직 참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해야 한다.

그래서 2:20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호와는 거룩한 성전에 있다. 온 땅은 그분 앞에서 잠잠하라”

잠잠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들이 하나님의 통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이다.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 안에 우상은 존재할 수 없다.

그분 앞에서 잠잠해지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삶이다.

하박국은 눈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시며 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며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게 하실 것을 보여주신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 앞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온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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