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의 이름은 ‘끌어안는 자’라는 뜻이다.
하박국은 그 이름의 뜻대로 역사의 어두운 밤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끌어안았다.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인 뜻’은 구원이다.
하나님은 이 뜻 가운데 때로는 재난을 허락하시고, 죄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하시기도 한다.
이 재난과 심판을 우리는 하나님의 ‘호용적인 뜻’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호용적인 뜻’에 의문을 가질 수 있으며, 하박국처럼 반항하듯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박국의 반항적인 태도 이면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받아들이려는 몸부림이 함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시적인 뜻’은 우리에게 믿음과 순종과 사랑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감사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구원과 축복과 회복이지만, 우리가 죄와 불순종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재난과 심판을 허용 하실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인도가운데 지시하시는 뜻이 있다.
그것이 하박국에게는 믿음이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은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과 심판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뜻인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다. 믿음만이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영적인 눈이 되어서 하나님의 허용적인 심판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 구원을 소망하게 된다.
즉, 믿음이 소망을 낳는 것이다.
하박국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허용적인 뜻, 심판을 끌어안으면서 믿음으로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박국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신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명성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을 이 시대에 다시 새롭게 하셔서 이 시대에 알려지게 하소서.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하소서”
(합 3:2)
무서움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만, 경외함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위의 말씀에서 “명성”은 주님의 복음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사야 53장 1절에서 이러한 고백을 한다.
우리가 들은 이 소식을 누가 믿으랴..
여기서 소식은 명성과 같이 사용된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종으로 보내시고 죽임 받고 고난당하시는 구원의 복음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믿기 어려워한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이사야도 누가 믿겠느냐고 말했다.
따라서 이처럼 놀라운 소식이 들려지고 그 소식을 믿게 된 것은 정말 큰 은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깨닫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경외함을 갖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도 6장 5절에서 자신의 부정한 입술로 인하여 자신이 얼마나 입이 부정한 사람인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었다.
다니엘도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온몸의 힘이 다 빠지는 듯한 경험을 했다.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계시 가운데 체험하고 그 발아래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하박국은 그러함 가운데 기도를 드리게 된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이 시대에도 다시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합 3:2b)
하박국은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자비를 베푸신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진노하신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또한 사랑스럽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사랑스러워지려면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사라져야 한다.
우리의 죄가 끊어지고, 악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겪지 않고는 우리는 그 죄와 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지 못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같은 진노’라고 말한다. ‘맹렬히 태우시는 소멸하는 불’이라 말한다.
불이라는 것은 가장 순수한 것이다. 물과 불, 가장 순수한 것이다.
고대의 철학자들도 모든 것의 기원이 물과 불과 같은 순수한 것이라 여겼다.
불 속에 던졌을 때, 왜 태워지는가? 순수하지 않은 것을 다 태워버리는 것이다.
불은 자신과 같이 순수한 것만 남기는 일이 태우는 것이다.
불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순수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 태우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C.S.루이스는 하나님의 자비를 잔인한 자비하심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진노와 심판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진노와 심판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진노와 심판으로 끝내시지 않는다.
그것이 궁극적인 뜻이 아닌, 허용적인 뜻, 과정적인 뜻이기 때문이다.
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시키고,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으로 변화시켜 주시려 하신다.
하박국의 시대는 심판이 임박한 시대였다.
하박국은 그 시대에도 다시 새롭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역사 가운데 자비를 베푸셨던 일이 다시 새롭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박국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모든 과정 속에 자연 만물까지도 함께 변한 역사들이 있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3b. 그분의 영광의 하늘을 덮고 땅에는 그분께 대한 찬송이 가득합니다
4. 그분의 광채가 햇빛과 같았고 두 줄기의 빛주기가 그분의 손에서 번쩍인 그 안에 그분의 권능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5. 재앙이 그분 앞에서서 나아갔고 전염병이 그분의 뒤를 따라 나아갑니다.
6. 그분께서 멈춰 땅을 측량하시며 그분께서 바라보니 나라들이 떱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산들이 무너지고 오랜 세월을 거친 언덕들이 무너져 버립니다.
(합 3:3b-6)
하나님께서 교만한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심판을 행하실 때 언제나 자연만물도 함께 무너지고 변화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하박국은 노래하는 것이다.
출애굽의 사건 속에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하박국은 이렇게 표현한다.
"주께서는 말을 타시고 바다를 짓밟으시고 물을 크게 휘저으십니다"(합 3:15).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며 목마름을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 바위에서 물을 터뜨리신 사건을 이렇게 비유한다.
"주께서 강으로 땅을 쪼개셨습니다"(합 3:9).
만물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에 대해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질서 있게 디자인하신 완벽한 지혜와 능력을 가진 분에 의하여 창조된 질서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붙들고 계시기에
타락한 역사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실 때 자연만물이 요동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요동치는 것은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과 별개가 아니다. 맞물려 있는 것이다.
최초에 인간이 타락할 때도 땅이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노아와 약속을 베푸셔서 최후의 심판 이전에는 모든 자연이 질서있게 유지되는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 일반은혜도 끝이 있다.
과거의 고대문명을 보면 화산, 지진, 해일 등으로 인해 수많은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들이 사라지게 된다.
교만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로 모든 산과 바다에 증거가 있다.
미국의 그랜드캐년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있다.
첫 설명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것이라 나오지만, 결론에서는 엄청난 과학자들이 엄청난 격변의 증거라고 말한다고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는 이 때에, 지구의 미래가 밝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허용적인 뜻과 지시적인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 자연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적인 뜻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재난과 심판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갸야 한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구원이다.
하박국이 주의 일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오늘 당시 시대에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죄와 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베풀어지기를 원한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변화로 인하여 심판의 때가 머지않았음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이 인간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구원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다고 나와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영화롭게 될 날을 바라보고 있다고 나와 있다.
지금은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가운데 있지만,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무너지고 있지만,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변화될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물이 함께 구속되고 자연도 함께 구속될 날이 있기에 그것을 소망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박국은 3장 13절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 중 가장 핵심적인 일에 대해 고백한다.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나오셨습니다.
주께서 약한 사람의 집 우두머리를 쳐부수셨고 발에서부터 머리까지 발가벗기셨습니다.”
(합 3:13)
이는 십자가를 연상하게 하는 말씀이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가벗기시고 모든 심판을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우리에게 주어진, 있을 수밖에 없는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는 구원이다.
하박국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우리에게 예언해준 것이다.
하박국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며 16절에서 하나님께 말한다.
“그 소리를 듣고 내 뱃속이 뒤틀립니다. 그 소리에서 내 입술이 떨립니다.
내 뼈가 썩어 들어가고 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하려고 오는 백성들에게 닥칠 재앙의 날을 조용히 기다릴 것입니다.”
(합 3:16)
하박국은 재앙의 날을 조용히 기다린 것이다. 재앙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 심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재앙의 날을 조용히 기다리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잘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역사의 있을 심판 가운데 심판을 기다리지만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심판자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판의 길을 통과하는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찾아오게 될 심판과 최후의 날 가운데
우리는 조용히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행하실 놀라운 구원을 바라보는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만 구원받는 영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수많은 영혼들에게
믿음의 은혜와 축복, 진노 가운데 베풀어 주시는 자비와 긍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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