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인 하박국서의 마지막 세 구절은 믿음의 정수라고도 불리는 하박국의 고백이다.
하박국은 항의에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두려움에서 믿음의 고백을 보이고, 염려함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하박국은 질문하고 하나님께 답을 듣는 과정 가운데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박국의 위대한 고백을 읽으며 감동하기는 쉽지만, 그 고백의 주인공이 우리 자신이 되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하박국의 고백은 머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머물러서는 불가능한 고백인 것이다.
하박국은 정보로서가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친밀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렀다.
본문말씀 짧은 구절에 우리는 하박국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풍성해짐을 알 수 있다.
하박국의 이 고백에서 나오는 것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들이었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절망이다. 이 절망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절망이었다.
그 절망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고백했다.
구원의 하나님, 자신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한 것이다.
이 고백 속에 아주 중요한 믿음의 비밀이 담겨있다.
첫째, 하박국은 하나님 그분만을 기뻐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어떠한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하나님만을 기뻐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 그 어떠한 것을 기뻐했다면, 그 모든 것이 상실되었을 때에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다.
욥도 동일한 시험을 받았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축복을 빼앗기게 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고 도전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도전을 받아들이셨다.
욥은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는 고통을 받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실 때, 반드시 이 과정을 적어도 한 번은 겪게 하신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다 사라질 지라도, 우리는 그 분을 기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하박국은 18절에서 여호와 그 분을 기뻐하였고 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여호와만을 기뻐한다는 고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인간의 제일되는 의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여러 가지 행위 목록을 만들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율법주의를 만들어낼 뿐이다.
우리가 가진 많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때문에 그 어떤 드림이나 헌신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는 없다.
시편에서는 감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나온다.
하박국은 하나님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우리로 인해 영광받으시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가장 기뻐할 때다.
이러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일부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자녀가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성공을 하면 그로 인해 부모는 나름 영광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자녀가 부모를 기뻐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많은 것을 이룬 자녀이지만 정작 그 자녀는 부모를 인정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무엇으로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 아무 영광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서 자녀가 사회적으로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부모를 기뻐하고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녀가 있다면 그 부모는 자녀를 통해 가장 영광을 얻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통해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 한분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영광 받으시도록 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바로 하박국의 믿음의 삶이었다.
이러한 삶은 육신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조나단 에드워드도
“인간의 가장 적절한 행복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간이 육신적인 출생으로 받은 것들로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우리의 일평생의 믿음의 삶은
‘하나님 그분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인가?’를 훈련하는 삶이다.
둘째, 하박국은 심판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였다.
하박국이 처음에 왜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을까?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재앙이 아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구원과 회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불순종 때문이다.
하박국은 이제 구원의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기뻐하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다보면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는 것만큼 신앙에 있어서 위기는 없다.
구원이라는 단어 이면에는 심판 받아 마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들어있는 것이다.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잃었다면 신앙의 위기가 온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더 나은 교양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에서 다시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3장 2절에서 하박국의 고백이 바로 그러한 고백이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이것 외에 어떠한 다른 교리도 이것을 대체할 수 없다.
셋째, 하박국은 자신의 힘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을 기뻐하였다.
심판 받아 포로로 잡혔다가 다시 돌아온 백성들이 성벽도 재건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회개하는 부흥을 경험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통곡했다.
그들에게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렇게 권면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다.”(느헤미야 8:10)
회개를 중단하라는 뜻이 아닌, 참된 회개는 이제 하나님을 기뻐하는 새 힘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슬픔과 통곡을 통과하여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혼들에게는하나님께서 새 힘을 공급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실 수 있었을까?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셨다고 나와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그 앞에 있는 기쁨'은 무엇인가? 바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 기쁨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하박국은 이러한 기쁨으로 인한 힘을 ‘사슴’으로 비유했다.
사슴의 힘찬 발걸음처럼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힘을 얻은 영혼은 힘있는 발걸음이 된다는 것이다.
거리를 걸어가는 발걸음만을 표시한다면 어쩌면 그 발걸음 만으로도 그 사람이 지금 영혼에 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희망으로 가득한 사람의 발걸음과 절망에 사로잡힌 삶의 발걸음을 다를 것이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의 발걸음과 방황하는 사람의 발걸음은 다를 것이다.
사슴의 발걸음은 높은 곳을 뛰어다닌다고 했다.
하박국 이전에 이러한 동일한 고백을 다윗이 했다.
“주께서 내 발을 암사슴의 발과 같이 만드시고 나를 높은 곳에 세우십니다.”(사무엘하 22:34)
이것은 신명기에서 이미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말씀이다.
“그분은 야곱이 그 땅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셨고
들판의 열매로 그를 먹이셨다.
그분은 바위에서 꿀을 내어, 딱딱한 바위틈에서 기름을 내어
그에게 힘을 복돋우셨다.(신명기 32:13)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하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민족인 너 같은 자가 누구겠느냐?
그분은 네 방패이며 도우시는 분이고 네 영광스러운 칼이시다.
네 원수들이 네 앞에서 움츠리고
너는 그들의 높은 곳을 발로 밟을 것이다.“(신명기 33:29)
여기서 ‘높은 곳’은 원수를 이기러 온 승리자의 발걸음을 말하는 것이다.
땅에 속한 것에 무너지지 않고 하늘에 속한 것으로 승리하는 인생, 죄와 탐욕에 휩쓸려가지 아니하고,
믿음의 축복을 누리는 승리자의 발걸음을 높은 곳을 뛰어다니는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찬양의 마지막 후렴은
“내 주여 내 발을 붙드사”라는 가사가 나온다.
‘저 높은 곳’은 죽어서 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 하나님이 나의 영혼의 힘이 되어주시는 것을 누리는 자들은 높은 곳을 향하여,
높은 곳을 뛰어다니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이재훈 목사님 말씀5] 20210704 주일말씀.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소서(하박국 3:17-19) (비공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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