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1)
미국의 어느 목사님. 저하고 신학을 공부했던 목사님의 딸이 갑작스러운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딸 간병의를 하시는데, 그 목사님의 일기중에 기도를 하다가 너무 분명히 들은 기도의 응답의 음성을 기록하였어요.
주님이 그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나만 보고,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만 하여라”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목사님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이제는 주님이 나를 완전히 지켜주신다.”라는 확신이 들었데요.
두려움도 떠나고, 오히려 마음에 기쁨이 넘쳤노라고...
여러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암에 걸린 자의 심정. 또는 내 가족 중의 한 명이 암에 걸렸을 때, 또는 여러분이 파산해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빚만 잔득 지고 있는 처지에서 인생의 절박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나만 생각하고, 나만 따르거라.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순종만 하여라”
여러분이 만약에 그런 분명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저절로 “아멘”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주님께 여러분의 염려 걱정이 다 맡겨지는 은혜를 누리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주신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편안할 때, 잘 될 때, 그래도 세상에서 날 찾는 사람이 많을 때, 그때 “나만 생각하라, 나만 바라보라. 나에게만 맡겨라. 내게 순종만 하여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는 어떨까요? 그때는 참 부담스럽게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의 형편이 다 좋은데,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순종하고, 꼭 그렇게 살아야돼요? 이런 말이 툭 튀어 나올 수 있다는 거죠.
바로 이것이 두려운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형편이 어떤지 깨달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진자 살 길을 붙잡은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거나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살지 못하는 거에요. 형편이 어려우면 간절히 주님을 찾다가도 조금만 형편이 편안해지면 그냥 주님을 잊어버리는 태도.
본론
(내용1)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 전투에서 졌을 때, 여호수아와 장로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특히 절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간의 죄를 제거하게 하시고 다시 아이성 전투를 하게 하실 때, 그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지시하는 데로 철저히 순종해서 두 번째 아이성 전투에서는 아이성 주민들을 다 죽이고 대승하지요.
자. 그런데 그들은 그 다음에 또 다시, 그만 영적으로 안일해졋습니다.
이스라엘의 아이성 승리 소식이 전해지고 가나안에 일곱족속이 살고 있는데, 그 일곱족속이 평소에는 으르렁 거리고 싸우는 관계였다가 다 연합군이 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그들이 다 힘을 단합해요.
그런데 그들 중에서 하위족속 기브온 사람들이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짓으로 화친을 청해 온거였어요. 마치 아주 멀리 살던 사람인 것처럼 오랜 여행을 통해서 그들이 온 것처럼 옷도 꾸미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빵에 곰팡이도 피게 해서 가지고 온거에요. 그러고는 화친조약을 맺자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이지 말라고 우리와 화진하자고. 그리고 우리가 당신들의 종이 되겠다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때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화친조약을 맺어요.
14절에 보면, “...주님께 묻지도 않은 채...”라고 나옵니다.
여러분 이 구절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성경구절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묻지도 않고, 여호수아 9장 14절 말씀.
주님께 묻지도 않은 채,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내내 이 구절이 떠올라야 해요.
무슨 결정을 내릴 때, 무슨 말을 할 때,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계약을 할 때, 싸인을 할 때,
‘주님께 묻지도 않은 채’ 이 말씀이 생각이 나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기브온 사람들과 화친 조약을 맺었을까요?
물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뭔가 궁금해야? 뭐가 좀 애매해야? 뭐 좀 곤란해야?
하나님께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자나요?
너무 뻔한 걸. 척보면 알잖아요. 척보면.
척보면 아는 거. 이제는 보심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보기에 척 보면 알았어요.
‘아. 이 사람들은 아주 멀리 사는 사람들이구나.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은 다 멸하라고 하셨지만, 멀리사는 사람들이야 화친을 맺고 또 우리 백성이 되겠다는데, 우리에게 손해볼것이 없잖아.’ 그래서 그들과 화친 조약을 맺은거에요.
알고 보니깐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족속 중에 하나에요. 하나님이 직멸하라는 족속들이였어요.
(간증1)
저는 ‘주님께 묻지도 않은 채’라는 이 구절이,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을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럽게 한 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도 주님께 묻지 않은 채,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대로 한 일들이 너무나 많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왜 내 삶은 이럴까? 왜 이런 답답함이 있을까? 아 이렇게 주님께 묻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고 했던 일 때문이 바로 그 때문 이구나.
여러분, 하나님께 묻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죄가 될 수가 없어요. 그것이 세상 법정에서 법대로 심판 받을 일입니까?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했다고.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입니까? 누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했다고 우리에게 뭐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죄라는 거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을 진짜로 믿습니까?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까?
세우고 패하는 권한이 하나님게 있음을 믿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그렇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논해야지요.
그게 마땅하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하지요.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한거지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주님이 내 인생의 주님 되심을. 내가 무시한거지요.
교만하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잘한다고 생각한 거지요.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죄지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복을 받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급하고 어려우면 ‘하나님 하나님’하다가 조금이라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형편이 좋고 하나님을 보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복을 받겠느냐 말입니다.
(예화2)
참 부끄럽기도 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께 묻기 싫을 때도 있어요.
잊어버리고 안 물어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묻기 싫을 때도 있어요.
어느 집사님이 무모한 투자를 하고 재정적으로 굉장히 어려움에 빠졌어요.
‘그럴 정도쯤의 사업을 했으면 기도라도 부탁을 하시지 그랬어요.’ 했어요.
전혀 아무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그랬더니 그 집사님께서 하시는 이야기가,
하지 말라고 할까봐 그랬다는 거에요.
아, 정말 기가 막히더라구요.
목사님께 기도 부탁하면, 하지 말라고 할까봐...
(예화3)
어느 목사님이 예수님의 동행 일기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예수 동행 일기에 대해서 듣기는 했는데, 쓰지는 않는데요.
솔직히 너무 싫다는 거에요.
일기를 매일 쓰는 것도, 그것을 교인들과 매일 나누는 것도, 싫다는 거에요.
힘들어서도 아니고, 바빠서도 아니고, 그냥 싫다는 거에요.
그렇게 사는게 싫다는 거에요.
그것이 우리의 정직한 모습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되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지만,
어떻게든 내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하고 싶고,
매 사를 하나님께 물어보고, 매 사를 하나님과 함께 하고... 그게 너무 싫은 거에요.
여러분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 복 받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용2)
이렇게 화친 조약을 맺어놓고 나니깐, 이 기브온 사람들이 거짓말 했다는 사실이 들어났지만, 이것을 물릴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 화친 조약은 그냥 지키기로 결정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아,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뭐 거짓말로 인해 속아서 하긴 했지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했으니,
너는 속였으니 나도 속인다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이.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없이 기브온 사람들을 살려주고 화친 조약을 지켰다. 라고 처음에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 그게 아니에요.
기브온 사람들의 일이 그정도의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기브온에 대한 마음이 억지로 받아주고, 거짓말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했으니 ‘아이고, 할 수 없구나’하는 이런 마음이 아니였어요.
하나님의 마음은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히 간절했어요.
하나님께서는 기브온 사람들을 정말로 기쁨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느꼈어요.
기브온 사람들은 거짓말을 했는데,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였는데,
그런데,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 봐야 해요.
기브온 사람들이 왜 거짓말을 했지요?
장난 친 것 입니까? 또는 기브온 사람들이 이익을 본 것이 있습니까?
기브온 사람들이 속여서 나중에 기습공격을 해 온 것입니까?
전혀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없어요.
그렇다면, 기브온 사람들이 왜 변장을 하고, 멀리서 온 사람들처럼 꾸미면서까지 ‘화친 조약을 맺어주십시오’라고 왜 그렇게 한 거죠?
그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안거에요.
자기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것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을 기브온 사람들이 안거에요.
자기들은 멸망당할 땅에 멸망당할 족속들 중에 자기들이 포함되어 있는거에요.
그것을 그들이 알았어요.
살아야 하잖아요.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었어요.
가나안 족속인걸 알면 자기들이 죽어요.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화친 조약을 맺어야 해요.
그 다음에 그들을 죽일지 살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이에요.
그길 밖에 없었던 거에요.
24절에 보면 자기들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속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주 하나님이 그의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이 참으로 사실임을 우리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라고 명하셨고, 이스라엘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이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들어서 알았습니다. 우리가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 때문에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라고 하신 것은 가나안 족속이 미워서가 아니였어요.
하나님이 그들을 여러 번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철저하게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고,
더 이상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정말로 완전히 마귀놀음만 하는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게 하신거에요.
그런데 느비딤 사람만이, 기브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믿은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믿은 거에요.
자기들이 죽게 된 것을 그들이 안거에요.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여러분,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
그도 똑같잖아요.
그는 하나님을 믿었어요.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어요. 여리고 성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정탐꾼을... 자기 종족을 소기면서까지 정탐꾼을 살려 줬잖아요.
기브온 사람들이 그렇게 했던거에요.
여러분, 자기들이 이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안 사람, 이 세상이 이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은 어떻게 해야해요?
기브온 사람들이 ‘우리는 멀리서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화친 조약을 맺어 주세요’
그것을 탓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오히려,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졌냐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졌느냐.
그리고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 받아야겠다는 갈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느냐?
하나님께서 왜 이 기브온 사람들을 귀하게 받아 주었는지 조금 이해 하실 수 있겠습니까?
기브온 사람들이 아주 족속이 작고, 그리고 평소에도 힘이 없고, 아주 참 나약하고, 그래서 조금 힘이 있는 족속에게 이리 붙었다가 저리 붙었다가 그런 사람들이라면 또 이해가 돼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기브온 사람들은 굉장히 강한 족속이였어요.
여호수아 10장 다음 장에 넘어가면, 10장 2절에 보면, 다른 가나안 족속 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고 그들의 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 초풍하는 줄 알았어요.
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깐.
어떤 족속이였길래 그렇죠?
여호수아 10장 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왕이 있는 도성처럼 큰 성읍이고, 아이 성보다도 더 큰 성인데다가, 기브온 주민은 모두 용맹한 전사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굉장히 강한 전사들이에요.
성읍은 왕도와 같은 큰 성읍이에요.
게다가 가나안 족속들이 다 연합하여 평소에도 싸우던 자들인데, 다 힘을 합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기로 작정을 한 상태입니다.
객관적으로 보거나 인간적으로 보면 가나안 족속들이 훨씬 강해요.
그런데 기브온 족속이 이렇게 찾아와서 우리가 종이 되겠다고까지 하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달라 화친 조약을 맺어 달라. 이게 정말 놀라운 거에요.
이것은 전적으로 신앙적인 눈이 뜨인 거에요.
진짜 하나님을 믿은 거에요.
사람의 수나, 인간적은 수만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진짜 믿은 거에요.
기브온 족속이 그렇게 해서 무슨 이익을 얻은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강한 용사중에 강한 용사들, 큰 성읍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요.
그때부터 그들은 나무를 하고, 물 긷는 일만 해요.
27절을 보세요. “바로 그 날로 여호수아는 그들을, 회중을 섬기고 주님의 제단을 돌보는 종으로 삼아.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을 맡게 하였다. 그들은 오늘까지 주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일을 하고 있다”
세상적으로 보면 기브온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꼴이 말이 아니게 된거에요.
그렇게 큰 성읍에, 그렇게 강한 용사들이, 이제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하는 신세가 되고,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어요.
아니, 세상에 왜 이렇게 하느냐 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아무리 큰 성읍을 가졌고, 그들이 아무리 큰 용사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이 다 전멸하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냐 말입니다.
성이 크다는 거, 그들이 용사였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제 다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 죽게 되었는데, 아니 성이 크다는 것, 그들이 용사라는 것.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것을 기브온 사람들은 깨달은 거에요.
비록 그들은 종이 되었지만, 무슨 종이죠? 하나님의 성전의 일을 하는 종이 되었어요.
그들이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성막에 들어가는 나무랑 물을 길어 섬기는 일을 한 것입니다.
성전 예배자가 된거에요.
용사였던 그들이 이제는 예배하는 자들로 섬기는 자들이 된거에요.
하나님께서 그 기브온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 하셨는가?
뒤의 성경에 나옵니다.
사무엘하 21장을 보면, 사울 왕이 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브온 사람들 편에 서요.
기브온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 갈 때, 그때 기브온 사람들은 “나는 유대인 사람이 아닙니다”하고 도망갈 수 있지요. 그런데 그때 같이 포로로 잡혀가요.
70년 뒤에 돌아올 때, 그때 예루살렘은 황패한 곳입니다.
유대인들 조차도 자리 잡은 사람은 안돌아왔어요.
그런데 느비딤이라는 이름으로 기브온 족속들은 다 돌아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재건하고 하는 일에 그들이 앞장서요.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이스라엘 백성 답게 살아갑니다.
(간증2)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기브온 사람들이 마음에 기억이 되는거에요.
제가 꼭 기브온 사람 같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3대째 목사에요. 그런데 3대째 목사가 뭐 좋은 겁니까?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산길자락을 돌아 다니고 있어요.
마귀가 3대째 목사는 바줍니까?
‘아 저사람은 3대째네. 2대째라면 내가 잡아 먹을텐데, 3대째네.’
이러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아마 더 달려 들꺼에요.
3대째 목사.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저는 어릴 때부터 목사 집에서 자라면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교회 어른들을 많이 봤어요.
무너진 분들도 많이 봤어요. 목사, 장로 자랑할 것이 못되더라구요.
하나님이 목사하라 장로하라하면 순종해야 하지만, 일부러 하겠다고 하는 일은 아니더라구요.
그 뒤의 심판이 무서워요.
믿음이 좋다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아도 무너진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저라도 다르겠습니까? 그것이 저에게 두려웠던 거에요.
나는 다를까?
겉으로는 성실하고 경건해 보이지만, 저의 속 마음은 제가 알지요.
똑같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똑같잖아요.
마귀가 삼키려고 돌아다니고 있어요.
야.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나이가 들면 조금 괜찮아 질까? 그렇지 않더라구요.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변화가 없고, 제 삶에도 변화가 없고,
오히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해 지는 경향이 있어요.
어느 순간에 나이가 엄청 들었어요.
주님 앞에 설 때가 문제지요.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3대째 목사다. 성실하다. 말은 들을 수 있지요.
사람의 평가가 중요한가요? 주님 앞에 섰을 때,
“내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아닐까?
나는 그 점이 매우 두려운 거에요.
결론
(내용3)
기브온 사람들이 멸망의 땅에, 멸망의 족속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고는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가만히 있으면 죽으니깐.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 받을 길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어쩔 수 없이 한 거에요.
그러고 그들은 구원을 받은것이거든요.
(간증3)
저는 제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 섰을 때, 3대째 목사요. 어떻게 이름만 기독교 인이 안 될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 많으니깐, 이것은 저에게 심각한 문제였어요. 그래서 저의 갈망이 기브온 사람들의 갈망과 같았어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돌아 다니는데, 어떻게 살지요?
하나님이 “나는 목자요, 너희는 양이다”라고 하신 목적이 있구나.
양이 이리가 삼키려고 돌아다닐 때, 살려고 목자 옆에 붙어 있는 것 밖에. 살 길이 없잖아요.
내가 믿는 예수님이 진짜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신 것이 진짜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한 순간에 가짜 목사인거에요.
주님 앞에 섰는데, 주님이 너무 낯설어요. 그러면 끝난거죠.
우리 주님 앞에 섰는데, 주님이 너무 친밀해요.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주님과 친밀하게 살아야죠.
지금 주님과 함께 친밀하게 살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 앞에 섰을 때 친밀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자고 한거에요.
저에게 있어서는 목회 조금 더 잘해보자. 그런 문제가 아니였어요.
제가 사는냐 죽느냐 하는 문제. 아니 진짜 예수 믿는 그 사람이냐?
예수님은 진짜 내 안에 계신거냐? 그 문제였어요.
처음에 일기를 쓰면서,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자고 한 것도 설교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주님을 바라보시라,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라고 설교해도 성도의 삶은 좀처럼 안변하는 거에요.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짜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 않다라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 줘야하지?
일기라도 매일 쓰게 해서 매일 점검해 줘야지.
힘들어요. 못하겠어요. 왜 이걸 쓰게 해서 부담스럽게 해요? 저도 다 압니다.
저도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안하던 일기를 쓰는 것이 쉬운 일이겠어요?
예수 동행 속해 다 참여하라고 다 권하지만 여러분들 안에 어렵다 하시는 분들 있는거 다 압니다. 그때 제 마음에 10년만 해 보자. 10년만. 정말 성도들이 변화 되는가? 변화가 된다면 이건 정말 해야 하는 거지요.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때 교인들에게 사과하고 그리고 일기 안써도 된다고 말할 수 밖에 없지요.
5년째 되던 해, 2016년. 일기는 1000번 쓰신 분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일기를 천번 쓴 사람들만 한번 모이자고 했어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일기를 천번쯤 써 보니깐 삶이 변화 됩니까?
그때 그분들이 하시던 이야기가.
“제가 일기를 1000번 쓰고 나니, 그전에 넘어지는 것 이제는 안넘어지는 것이 깨달아 졌습니다.”
그러면 됐다.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면, 한 번 해 보자. 끝까지 해보자.
지지난주 토요일에 예수 동행 일기 10년 째 되던 해,
증인 모임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바라보고 살았던 지난 세월동안 삶의 변화에 대한 간증과 고백이 참 많았어요. 예수님만 그냥 바라보라고 한 것.
그런데 그런 자체도 기브온 사람과 같은 마음이 아니면 못하는 거에요.
진짜 여러분 자신이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냐 아니냐 그게 어디서 결정나는 거지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냐 아니냐는 진짜 믿느냐 아니냐에 결정나는 거에요.
그냥 교회만 다니고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예수 믿는거 아니에요.
기도를 해도 어려우면 살려주세요. 살려내면 잊어버리고 그러고 나면 기도 생활도 안해요.
형편이 좋으나 안좋으나 난 항상 주님 바라보고 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지.
왜 그렇게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마귀가 삼키려고 울고 있는 형편에 살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 진짜 예수님과 살지 않으면 다 무너져요. 다 넘어집니다.
예수 믿고도 저 모양이야? 그런 소리 지금 많이 듣잖아요?
이제는 숨길수도 없어요.
(기도)
이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기브온 사람들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이것이 진짜여야 해요.
멸망 당할 땅에서, 멸망 당할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여기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어떻게 구원 받아야 하나?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절대로 적당하게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그냥 교회만 나오시거나 영상으로 예배드린 것으로 예수 믿는 줄 아시는 분들은 마음을 바꾸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심정으로 그렇게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받아 주십니다
진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였든지 간에, 주님은 책임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십니다.
주여, 내가 그런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주여, 내가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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