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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목사님

김병삼 목사님 - 인정받고 싶은게 잘못 인가요?(사도행전 5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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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받지 못해 상처 받은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헌신에 대해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을 너무 많이 받다보면, 교만해지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인정은 갈급함에 대한 문제와 교만함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인정 받고자 하는 일은 선한 동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한 동기를 가지고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선한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선한 의도로 일을 하고, 인정을 받겠다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을 보면 내가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큰, 어쩌면 선한 의도라고 포장을 한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어떤 인정을 받을 것인가를 더 많이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 선수가 기도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권투시합하는 곳에 가서, 트레이너와 코치가 있는 대기실에 들어가 그 교인, 그 선수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었습니다.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오늘 경기에서 이기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1회전부터 두들겨 맞는거에요. 제가 어떤 기도를 했죠? 이기게 해주세요.

그런데 계속 맞다가 졌어요. 제가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안되는거에요.

하나님, 왜 졌어요? 기도를 하는데, 이런 질문이 되돌아왔어요.

'왜 이겨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이겨야 하는 이유가 하나였어요. '제가 사람들 다 보는데서 기도했으니까요'

내가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수 있는거에요.

담임목사가 기도했으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입장 곤란한 문제시죠.

이 선수가 이겨야 제가 체면이 서니까, 기도를 한거에요.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전북현대의 송범근 선수가 우리교회에 다니는데, 이 친구가 경기전에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7경기 연속으로 승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성남에서 경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목사님들과 같이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하나님 꼭 이기게 해주세요 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봤는데, 5대 1로 이겼어요.

제가 경기를 보고 오면서, 아내에게 '역시 담임목사가 직관을 해야 이기는구나' 라고 이야기했어요.

제가 뭐 잘한 것처럼 이야기를 한거죠.

자, 우리들 속에 찾아오는 기쁨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잘한 것에 대한 만족과 기쁨인가를 잘 구분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아나니아와 십비라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옵니다.

이들은 왜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내놓았을까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을 받은 자들이 다 모여서 각각의 소유를 내놓고 팔아서

각각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을 보면, 32-37절을 보면 바나바라 하는 유명한 인물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가지고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문맥을 봤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가 했던 행동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 거짓말을 하며 성령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며 성령을 속이는 것? 이것을 쉽게 볼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 3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였다라고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가득한데,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였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신유 사역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사역 가운데 도덕적으로 타락하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성령의 역사할 때, 비도덕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 속에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니, 그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고, 사탄이 들어가서 그 마음을 어둡게 하니, 성령을 속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가 담대하게 일을 해낼 수 있지만, 우리 안에 사탄이 가득할 때 우리가 담대하게 성령님을 거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우리 안에 성령이 아니라 사탄이 가득하여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잘못된 욕망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신앙생활 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을 해드리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을 해드리기 위해서 돈을 훔쳐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려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이 선물을 기쁘게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할 때, 우리의 정직함과 의로움을 보시는 것이지 불의함을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인정에 목마르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은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하고 따르고 있었던지, 아니면 태생적으로 재산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는데, 부자들이 다 자기 재산을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필요에 맞게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내어놓고 나눈 사람보다 그것을 통해 도움을 받은 사람이 훨씬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산을 판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하나님의 일하심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것 중에 하나로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공부를 하고 성령충만한 사람 중에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 충만해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부분도 이야기를 하시지만, 하나님의 은사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심이라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각 교회와 공동체, 개인에게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는데 갖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 초기에 부러움들이 있었는데 첫번째 부러움은 음악에 대한 부러움이었습니다.

악기를 잘 다루고 노래도 잘하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

내가 가지지 못한 은사를 부러워하기보다 그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동역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이냐는 마음을 주셔서, 그 이후로부터는 좋은 은사를 가진 사람을 보면 시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는 장점은 나에게 없는 것에 대해서 시기하기보다, 저에게 기쁨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정 받으려는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잘 섬길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잘 쓰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인정의 욕구는 시기심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시기심은 하나님 앞에 큰 죄로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시기심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 한 성령님이 각 자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서 각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시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중 하나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과 자꾸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세번씩이나 주님 사랑합니다. 아시잖아요 라고 하죠.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면서, 베드로의 순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자기 옆에 있던 제자가 바로 요한이에요.

요한복음의 요한은 자기를 설명할 때,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옆에 있는 요한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주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요 21:22 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게 무슨 이야기는 '쟤는 어떻게 살겠습니까'라고 베드로가 주님께 질문을 하니까 '신경꺼. 너 할일이나 잘해'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가만히 보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며 시기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믿음의 분량과 사역 그것들이 우리 눈에 들어와야 하고 그것으로 쓰임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자꾸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들. 그것이 우리를 망가지게 하는거에요.

평신도를 가지고 예를 드는 것보다 목사님들 가지고 안좋은 예를 드는게 더 좋으시죠.

목사님들 사이에는 시기심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목사님이 어떤 사람인가가 드러나는 때는 바로 강단위에서 설교할 때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모든 목회자들은 설교를 잘하고 싶어요. 그리고 목회자들이 서로 비교를 해요. 나보다 설교를 잘하는 것 같아. 저 사람은 나보다 설교를 못하는 것 같아. 이러면서요.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야'라고 인정을 하면 문제가 없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 같은데 쓰임 받는 것에 대해 견디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모든 목회자들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누가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후계자가 될 것이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용기 목사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독특한 제스츄어나 추임새들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R.T.켄달 이라는 목사님이 '하나님을 열망하다'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우리가 빌리 그레함 목사님처럼 쓰임 받지 못하는가. 왜 능력많은 우리가 쓰임 받지 못하는가.

주권적인 하나님의 결정 때문이다.

내가 어떤 재능이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으로 쓰임 받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맞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 결정이 되는지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인정하게 될 때, 시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4절 말씀.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으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가장 큰 문제는 거짓인거에요. 사람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자의적인 일, 바로 인정 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거짓을 행하고, 존경 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죄를 지은것입니다.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에 대한 치명적인 문제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오로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마음만 있었고, 그것이 존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존경을 바라보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고 한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혼동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과를 바라보며 선행을 하면 실족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 이유는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하면서도 상처받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헌신한만큼 복을 주세요! 라고 할 때,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헌신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이유가 될 때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내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기려고 보니까, 내가 누군가를 흉내내려고 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면 아픈 손가락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똑같은 것을 요구하시거나 똑같은 은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지 않을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게 결국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깨어진 것, 어떻게요? 정직하지 못함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바라보며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의 영을 시험하느냐'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공모하여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다니 이 무슨 일이냐'

거짓의 무서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인정에 목마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6장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 혹은 선행. 사람 앞에서 보이려고 하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보이려고 하는 것인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이재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었는데, 인상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성령님을 시험하다가 죽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임하였기 때문에, 성령을 거스르면 죽어요. 청년들이 와서 그의 시신을 떠메고 나아가서 장사를 지내죠. 그들이 다시 들어와서 또 다시 삽비라의 시신을 들고 나갑니다.

그 청년들이 그 시신을 들고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는 이러면 안되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죽음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비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죽음은 '천국소망'인데,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왜 그들이 비참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는데, 단지 정직하지 않았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영적인'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로기코스. 이성적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

이성적 말고 영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로기코스라는 말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실 때, '아버지여 될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파토스 - 감정. 예수님의 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정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로기코스 까지 나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그들이 섰다면 이토록 비참해지지 않았을텐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쑥불쑥 이러한 감정, 특별히 오늘 말씀과 같이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들이 생길 때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감정이, 그렇게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길 때,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할 때,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로기코스.

이성적 영적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을 때, 이성적 영적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살아 가기보다

누군가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사람, 그것이 큰 축복임을 깨닫고 그렇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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